맹목의 덫 제33화 - 심판의 연회, 붉은 침의 선언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지하 50미터, 과거 방공호로 쓰였던 공간은 이제 '위원회'의 화려한 비밀 회의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은 차가웠고, 원형 테이블 주변으로는 대한민국 각계각층의 정점에 서 있는 7명의 간부들이 모여 앉았다. 그 중심에는 안세훈 장관의 빈자리를 대신해 실권을 잡은 '성 고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노신사였으나, 그가 지휘하는 '블랙 넷'의 잔혹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회의의 안건은 단 하나, 요새를 파괴하고 도망친 '실험체 도준'의 공개 처형과 프로젝트의 재가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준의 죽음을 논의하는 그 순간, 도준은 이미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침투해 있었다.
침묵의 서빙: 보이지 않는 처방의 시작
도준은 제문과 석구가 확보해준 위원회 내부 청소 대행업체의 신분증을 이용해 요원으로 위장했다. 그는 유진의 유산인 '역세(逆世)의 독'을 미세한 증기 형태로 변환해 회의장의 환기 시스템에 미리 살포해둔 상태였다. 이 독은 즉사시키지는 않지만, 신체의 반사 신경을 극도로 저하시켜 도준의 은침이 들어올 틈을 만드는 보조제였다. 도준은 무거운 은쟁반을 들고 간부들에게 다가갔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은색 빛을 감추기 위해 검은 렌즈로 가렸으나, 타겟을 향한 살기만은 감출 수 없었다. 도준은 성 고문의 옆에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소매 속에서 정교하게 개조된 5연발 은침 사출기를 가동했다.
성 고문은 기묘한 향취를 맡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와인에서 고향의 냄새가 나는군. 보경당의 그 썩은 약초 냄새 말이야." 성 고문의 말과 동시에 도준은 쟁반을 던지고 몸을 날렸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회의장의 정적이 깨졌고, 도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은침이 좌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간부의 목 뒤를 관통했다.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고, 성 고문의 전용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총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역세의 독'이 이미 그들의 신경계를 갉아먹고 있었다. 경호원들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경련하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성 고문의 반격: 제어할 수 없는 인간 병기
성 고문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의자 밑에 숨겨진 비상 스위치를 눌렀다. 회의장 벽면이 열리며 도준이 읍내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체구를 가진 '완성형 강화병' 셋이 쏟아져 나왔다. "도준아, 넌 실패작이다. 자아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오류지. 여기 이들은 자아도,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완벽한 내 아들들이다." 성 고문의 명령에 강화병들이 도준에게 달려들었다. 도준은 작두를 휘둘러 첫 번째 병사의 팔을 걷어냈으나, 그는 팔이 잘려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무표정하게 반대쪽 주먹으로 도준의 가슴을 강타했다. 도준은 벽에 부딪혀 피를 토하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고통은 그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은색 눈동자를 더욱 밝게 타오르게 하는 연료가 될 뿐이었다.
난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천장에서 섬광탄이 터졌다. 제문이었다. 그는 관제실을 점령해 회의장의 모든 보안 카메라를 무력화하고, 미리 준비한 마비 가스를 살포했다. "도준아, 지금이야! 성 고문을 잡아!" 제문의 외침과 함께 도준은 바닥을 구르며 강화병들의 발목에 특수 은침을 꽂아 넣었다. 이 침은 근육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경 전도를 과부하시켜 심장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강화병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것을 본 성 고문은 비로소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비밀 통로로 도망치려 했으나, 어느새 도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도준의 손에는 피 묻은 메스가 번뜩이고 있었다.
가면 뒤의 진실과 마지막 처방
도준은 성 고문의 목덜미를 잡아채 테이블 위로 내팽개쳤다. "당신들이 만든 세상은 이 지하 요새처럼 폐쇄적이고 숨 막히는 곳이었어. 이제 그 환기를 내가 시켜줄게." 도준은 성 고문의 안면 근육을 하나씩 해부하듯 은침을 꽂았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성 고문의 얼굴 너머로, 도준은 그가 안세훈과 함께 엄마를 고문했던 과거의 기록들을 떠올렸다. 성 고문은 공포에 질려 빌었다. "제발... 살려줘. 위원회의 윗선이 누군지 다 말하겠다! 국가의 수뇌부 중 누가 이 실험을 지원했는지..." 하지만 도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도준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이 추악한 계보의 종말이었다.
33화의 끝, 도준은 성 고문의 혀와 손가락 신경을 영구히 마비시키는 마지막 은침을 시술했다. 죽이지는 않되, 평생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는 '침묵의 감옥'에 가둔 것이다. 제문이 회의장에 진입했을 때, 도준은 피 묻은 앞치마를 벗어 던지며 서 있었다. 남겨진 5명의 간부 역시 도준의 '처방'에 의해 식물인간 상태로 변해 있었다. 제문은 참혹한 현장을 보며 도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위원회의 수뇌부는 전멸했다. 하지만 도준아... 네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있어." 도준은 대답 대신 비틀거리며 회의장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요새의 자학적인 비명 같은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40화 완결까지 이제 7화, 도준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