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27화 - 버려진 요새, 부자(父子)의 단죄

광화문의 화려한 조명은 꺼졌지만, 도시 아래 깊숙한 곳의 지옥은 이제 막 문을 열었다. 유진의 총격과 함께 무대 아래로 추락한 도준과 안세훈은 장치실 하부의 비밀 통로를 타고 근처 폐건물 지하 벙커로 떨어졌다. 이곳은 안세훈이 비상시를 대비해 마련해둔 은신처이자, 과거 '그림자' 요원들을 고문하고 폐기하던 도축장과 같은 곳이었다. 도준은 가슴에서 울컥거리는 피를 토해내며 벽을 짚고 일어섰다. 유진의 탄환은 심장을 비껴갔지만, 그의 폐부를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반면 안세훈은 추락의 충격으로 다리가 꺾인 채 바닥을 기며 구석에 놓인 비상용 권총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가슴의 총상을 움켜쥐고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작두를 고쳐 쥐는 도준의 처절한 투지


피로 얼룩진 계보, 인간이길 거부한 아버지

도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안세훈의 손등을 작두날로 찍어 눌렀다. "아저씨... 아니, 아버지. 여기가 당신이 꿈꾸던 왕국의 끝인가요?" 도준의 목소리는 은색 눈동자만큼이나 차갑고 건조했다. 안세훈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독기 서린 눈으로 도준을 쏘아보았다. "닥쳐라, 이 괴물 같은 것!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내 유전자로 만든 가장 정교한 오점일 뿐이지. 네 엄마가 너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넌 이미 훌륭한 '도구'로 완성되어 국가를 위해 쓰였을 거다." 안세훈의 말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그는 자식을 자신의 야망을 위한 부산물로만 여기고 있었다.

도준은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엄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보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괴물로 만들려 했다. 도준은 품속에서 엄마의 유품인 은침 꾸러미를 꺼냈다. "엄마는 나를 바보라고 불렀지만, 당신은 나를 오점이라고 부르네요. 하지만 아빠, 오점은 지우는 게 아니라 덮어쓰는 거예요." 도준은 안세훈의 신경 마디마다 하나씩 침을 꽂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이는 침이 아니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역치를 극대화하여, 작은 숨소리조차 칼날로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극통(極痛)의 처방'이었다. 벙커 안은 안세훈의 짐승 같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옥상의 사냥꾼, 제문의 멈추지 않는 추격

같은 시각, 광장의 소동을 뚫고 옥상으로 치고 올라간 제문은 멀어지는 유진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유진은 도준과 안세훈이 서로를 파멸시키길 기다리며 유유히 현장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유진! 거기 서!" 제문은 화상의 고통도 잊은 채 옥상 난간을 뛰어넘으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유진은 소총을 버리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형사님, 이제 그만하시죠. 저 두 괴물이 죽어야 이 세상의 악취가 사라지는 거예요. 당신도 그걸 원하잖아?" 유진의 도발에 제문은 권총을 집어 던지고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법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으로 이 비극의 고리를 끊어야만 했다.

제문과 유진의 격투는 처절했다. 유진의 단검이 제문의 어깨를 깊숙이 찔렀으나, 제문은 굴하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꺾어 제압했다. "네 복수가 정당하다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저울질할 권리는 없어. 도준이는 너와 달라!" 제문은 유진을 난간 끝으로 몰아넣으며 수갑을 채우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마지막 수단으로 품속의 소형 폭탄 스위치를 눌렀다. 옥상 한쪽이 폭발하며 제문은 다시 한번 큰 충격을 입고 쓰러졌다. 유진은 연기 속으로 몸을 던지며 사라졌고, 제문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지하 벙커의 위치가 표시된 도준의 피 묻은 GPS 단말기를 손에 꽉 쥐었다.

최후의 처방전, 단죄의 완성

지하 벙커의 공기는 비릿한 혈향과 타오르는 전선의 냄새로 가득했다. 도준은 이제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안세훈 앞에 앉았다. 안세훈의 눈동자는 공포와 고통으로 뒤섞여 초점을 잃어갔다. 도준은 자신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찍어 안세훈의 이마에 읍내 보경당의 표식을 그렸다. "아빠, 이 약은 당신이 평생 기억하게 될 마지막 감각이에요. 당신이 죽인 사람들, 당신이 버린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당신의 심장 박동과 함께 평생 울릴 거예요." 도준은 마지막 은침을 안세훈의 연수(延髓)에 깊숙이 꽂았다. 안세훈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영원히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으며 오직 고통만을 느끼는 산송장이 되었다.

제문이 벙커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도준은 안세훈의 품에 머리를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아빠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 같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제문은 떨리는 손으로 도준의 맥박을 짚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고동이 느껴졌다. "도준아... 이제 끝내자. 제발..." 제문은 도준을 등에 업고 연기가 자욱한 벙커를 빠져나왔다. 뒤편에서는 안세훈의 비밀 기록들이 불타오르며 거대한 화염을 내뿜고 있었다. 국가를 뒤흔든 대선 후보의 추락과 숨겨진 괴물의 탄생은 그렇게 지하 깊은 곳에 묻히는 듯했다.

27화의 끝,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도준의 곁을 제문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 도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그의 감겨 있던 눈꺼풀 아래로 은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지만 도준이 입을 열어 뱉은 첫마디는 제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저씨... 나 배고파요. 엄마는 어디 있어요?" 도준의 목소리는 다시 읍내의 바보 도준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걸린 미세하고 서늘한 미소는 그것이 연기인지, 혹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한 또 다른 인격의 탄생인지 알 수 없게 만들며 새로운 공포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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