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21화 - 인자한 포식자, 안개 속의 진료실
읍내 보건소의 밤은 정지된 시간 같았다. 낡은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내뱉는 소음만이 복도를 채웠고, 창밖에서 밀려온 안개는 유리창에 달라붙어 내부를 훔쳐보는 유령처럼 일렁였다. 도준은 소리 없이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조차 죽인 그의 움직임은 이제 완벽한 포식자의 것이었다. 복도 끝,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따라 도준이 멈춰 섰다. 그곳에는 읍내의 성자라 불리던 남자,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엄마를 파멸로 몰아넣은 진짜 흑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자의 가면을 쓴 괴물과의 재회
보건소장은 휠체어에 앉아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준이 방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손님을 맞이하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결국 왔구나. 네 엄마의 눈을 빼닮은 아이야." 보건소장의 목소리는 인자했고, 그 안에는 읍내 사람들이 칭송하던 자비로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도준은 그 목소리 아래 깔린 차가운 무관심을 읽어냈다. 도준은 어깨에 멘 작두를 내려놓으며 보건소장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아니면 나를 만든 의사 선생님인가요?" 도준의 질문은 서늘하게 방 안을 갈랐다.
보건소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부성애 대신 흥미로운 실험체를 관찰하는 학자의 호기심만이 서려 있었다.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란다. 네 엄마는 너를 지키기 위해 너를 파괴했지만, 나는 너를 완성하기 위해 네 엄마를 이용했을 뿐이야." 보건소장은 책상 위의 낡은 영사기를 켰다. 벽면에 비친 흑백 영상 속에는 어린 시절의 도준이 보건소 침대에 누워 발작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엄마가 도준을 살리기 위해 매달렸던 그 모든 치료가, 실은 보건소장이 설계한 신종 신경 약물의 임상 시험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도준은 영상 속의 자신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엄마는 도준을 살리려 보건소장을 믿었으나, 보건소장은 그 맹목적인 모성애를 이용해 도준의 뇌를 망가뜨리고 자신의 연구를 완성해왔던 것이다. 읍내 국회의원은 그저 이 거대한 실험의 자금줄에 불과했다. 도준은 손에 쥔 메스를 떨며 보건소장의 목을 겨냥했다. "엄마는 아저씨를 믿었어. 아저씨가 나를 고쳐줄 줄 알았다고!" 도준의 외침에 보건소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넌 완벽해졌지 않니. 고통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최상의 포식자로 말이야."
보건소 지하의 거대한 공동묘지
도준은 보건소장의 목을 바로 긋는 대신, 그가 숨겨온 진실을 더 깊이 파헤치기로 했다. 보건소장의 휠체어 밑바닥을 걷어차자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가 드러났다. 지하실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자, 그곳에는 도시의 폐기물 처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실험실이 나타났다. 수많은 유리관 속에는 읍내에서 실종되었던 아이들의 이름표가 붙은 장기들이 보존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망각과 각성'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연구 논문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읍내는 이 남자의 거대한 사육장이었고, 주민들은 그가 키우는 가축에 불과했다.
도준은 실험실 한가운데 놓인 수술대 위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엄마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낡은 비녀였다. 보건소장은 탈옥한 엄마를 이곳으로 유인해 마지막 실험의 재료로 삼았던 것이다. "엄마를 어떻게 했어!" 도준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건소장은 지하실 스피커를 통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네 엄마는 끝까지 너를 잊으라고 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증폭시켰지. 네가 지금 느끼는 그 분노가 바로 내 연구의 정점이다, 도준아." 보건소장은 리모컨을 눌러 지하실의 보안 시스템을 가동했다. 벽면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준은 가스 속에서도 엄마의 비녀를 품에 안고 보건소장을 향해 달렸다. 폐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감각은 오히려 더 예리해졌다. 보건소장은 자신의 창조물이 자신을 죽이러 오는 광경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도준의 작두가 지하실의 철제 기둥을 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아저씨는 의사가 아니야. 그냥 죽어야 하는 사냥감일 뿐이지." 도준은 엄마가 가르쳐준 침술과 자신이 깨달은 살인 기술을 결합해, 가스 속에서도 보건소장의 급소를 정확히 찾아냈다. 은침이 공기를 가르며 보건소장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맹목의 끝, 새로운 악의 탄생
보건소장은 사지가 마비된 채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승리자의 것이었다. "죽여라... 네가 나를 죽이는 순간, 너는 완벽하게 나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도준은 보건소장의 목에 작두날을 갖다 대었으나, 문득 멈춰 섰다. 죽음은 이 인간에게 너무나 과분한 구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준은 대신 보건소장의 뇌 신경 중 기억과 언어를 담당하는 부위에 은침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자신이 겪었던 그 암흑의 시간을, 이제는 창조주에게 되돌려줄 차례였다. 보건소장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며 짐승 같은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제문은 뒤늦게 보건소 지하에 들이닥쳤으나, 그가 본 것은 폐허가 된 실험실과 백치가 되어 벽바닥을 긁고 있는 보건소장뿐이었다. 도준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제문은 바닥에 떨어진 엄마의 비녀와 '성공'이라고 적힌 실험 보고서를 보며 무너져 내렸다. 이 읍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도준이라는 통제 불능의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음으로써 더 거대한 재앙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문은 불타오르는 실험실을 뒤로하고 안개 속으로 뛰어 나갔지만, 어디에도 도준의 흔적은 없었다.
21화의 막이 내리며, 읍내를 떠나는 버스 맨 뒷좌석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엄마의 비녀를 매만지며 낮게 흥얼거렸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슬프지도,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오직 깊은 공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버스가 안개를 뚫고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도준은 가방 속에서 새로운 침통을 꺼냈다. 그 위에는 '보경당'이 아닌, 도준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냥은 이제 읍내를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번져나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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