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15화 - 박제된 기억과 안개의 귀환

보경당의 화염은 읍내의 반을 태워버릴 듯 기세등등했으나, 결국 차가운 새벽비에 굴복하며 검은 연기만을 남긴 채 사그라들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탄 시신들과, 그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도준뿐이었다. 엄마의 시신은 불길 속에서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경찰은 이 참극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 도망자(엄마)에 의한 동반 살살 미수 및 방화'로 잠정 결론지었다. 도준은 인근 대도시의 정신병동 폐쇄 구역에 수용되었다. 그는 더 이상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 완벽한 '백치'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지워진 기억인가, 박제된 연기인가

형사 제문은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들의 자창(刺創)은 노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깊고 정교했다. 제문은 병원 복도의 그림자 속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도준을 관찰했다. 도준은 하루 종일 창밖의 안개만을 바라보며 가끔 입술을 웅얼거렸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도준이 극한의 트라우마로 인해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빠졌다고 진단했지만, 제문은 믿지 않았다. 그는 도준이 스스로 머리 뒤편에 은침을 꽂던 그 마지막 찰나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을 영원히 가두려는 자의 결연한 눈빛이었다.

"도준아,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 제문이 방 안으로 들어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도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제문은 도준의 손등을 유심히 살폈다. 작두를 휘두르고 침을 놓던 그 정교한 근육의 움직임은 사라졌으나, 손등에 남은 작은 흉터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증거였다. "네 엄마는 죽었어. 불타서 재만 남았다고. 근데 신기하지 않니? 그 난리통에 이 침통 하나만은 멀쩡하게 남았더라." 제문이 검은 재가 묻은 엄마의 은침통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도준의 호흡이 아주 짧게 멈췄다. 제문은 그 0.1초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도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아파... 여기 아파..." 도준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의료진이 달려와 제문을 밖으로 밀어냈고, 도준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발작이었으나, 제문은 소름이 돋았다. 도준의 울음소리 끝에 섞인 미세한 웃음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준은 지금 자신을 감시하는 모든 이들을 상대로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엄마가 남긴 '망각'이라는 유산을 방패 삼아, 그는 법의망이 닿지 않는 안전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불타버린 약재상 터에서 기적적으로 타지 않고 발견된, 검은 재가 묻은 엄마의 은침통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한편, 불타버린 약재상 터에는 밤마다 의문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국회의원 측의 중앙 권력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라진 수첩과 증거들이 담긴 서버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들은 잿더미를 뒤지고 읍내 주민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읍내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도준이 심어놓은 공포와 그들에게 나누어준 '환각의 약'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준이 돌아오기를 은밀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준은 살인마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과 고통을 마취시켜준 유일한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병원 지하 세탁실, 도준은 진정제 기운을 억누르며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낮의 그 백치 같은 모습과는 딴판으로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 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약초 주머니를 꺼냈다.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기억을 되살리고 정신을 맑게 하는 비방의 약초였다. 엄마는 잊으라고 했지만, 도준은 그 유언마저 배신했다. 그는 약초를 씹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읍내 유력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약점, 그리고 아직 처리하지 못한 제문의 얼굴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도준은 병원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 거긴 따뜻해? 나는 이제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든 이 세상을, 내가 더 예쁘게 완성해볼게." 도준의 나직한 속삭임이 환기구를 타고 복도로 흘러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도준을 감시하던 경비원 한 명이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의 뒷목에는 정교한 침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에게는 어젯밤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사냥꾼은 더 이상 읍내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에서, 엄마의 작두 대신 더 날카롭고 은밀한 침을 들고 다시 사냥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냥터, 그리고 깨어나는 공포

제문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익명의 봉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불타버린 약재상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도준과 엄마, 그리고 그들 뒤에서 얼굴이 지워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붉은 글씨로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맹목은 죄가 아니라, 생존이다.] 제문은 이 메시지가 도준이 보낸 초대장임을 직감했다. 도준은 자신의 기억이 박제된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진화했음을 제문에게 선언하고 있었다.

도시의 밤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났지만, 그 골목길 끝에는 읍내에서 건너온 듯한 짙은 안개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도준은 병원을 빠져나와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았고, 누구보다 당당하고 빠른 걸음으로 어둠을 헤쳐 나갔다.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이 낳은 이 괴물은 이제 자신의 창조주를 잃고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15화의 막이 내리는 순간, 도준은 길가에 버려진 낡은 작두 하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입가에 걸린 기괴한 미소는 이제 막 시작될 두 번째 참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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