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39화 - 마지막 진료, 보경당의 해방
위원회라는 거대한 망령이 도시의 화려한 조명 뒤로 스러진 지도 어느덧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인체 실험 스캔들은 수많은 고위층의 구속과 제도적 정비를 남긴 채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 거창한 정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정작 그 지옥의 심장부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깊은 산자속으로 숨어들었다. 읍내 보경당은 불타 없어졌지만, 도준과 제문, 그리고 소년 '신'은 지리산 자락의 낡은 민가를 개조해 작은 약방을 열었다. 간판도 없는 그곳의 처마 밑에는 이름 모를 들풀들이 약재 냄새를 머금고 파릇하게 피어나 있었다.
해부의 손길에서 치유의 손길로: 다시 잡은 은침
도준의 몸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으나, 과거 초인적인 감각을 선사했던 은색 눈동자는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깊고 맑은 검은 눈동자였다. 이제 도준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객의 기척을 읽는 대신, 환자의 거친 숨소리와 맥박에 담긴 고통의 깊이를 읽어냈다. 도준은 마루에 앉아 볕을 쬐며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마강신'의 후유증으로 손끝의 감각은 예전만 못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옆에서 약초를 다듬던 소년 '신'이 도준에게 다가와 넌지시 은침통을 내밀었다. "형, 오늘 아침에 마을 할머니가 오신대요. 허리가 또 끊어질 듯 아프시다고요." 도준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엷게 웃었다. 이제 소년의 눈에는 살기가 아닌,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다.
도준은 환자를 마주할 때마다 예전처럼 작두를 잡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남긴 낡은 침통에서 가장 가느다란 침을 꺼냈다. 침 끝이 환자의 혈자리에 닿는 순간, 도준은 느꼈다.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해부와 단죄가 어둠을 도려내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의 시술은 끊어진 생명의 흐름을 잇는 기나긴 속죄의 과정임을. "할머니, 조금 따끔할 거예요. 하지만 이 침이 지나가면 내일은 들판에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도준의 나직한 목소리에 환자는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그 광경을 문밖에서 지켜보던 제문은 담배 대신 사탕을 입에 물며 껄껄 웃었다. 형사직을 내려놓고 이곳의 '뒷방 늙은이'를 자처한 그는, 이제 권총 대신 약초 캐는 호미를 든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렸다.
끊어진 사슬,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약속
어느 날 저녁, 석구가 도시에서 구해온 신문을 들고 숨을 헐떡이며 약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준아! 이것 좀 봐! 위원회의 마지막 남은 자금이 전액 피해 아동들을 위한 재단으로 기부됐대! 그리고 그... 안세훈의 아들도 자수했다더라고!" 석구의 호들갑에 도준은 그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어지러웠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소음들이 도준의 평화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도준은 마당에 서서 저 멀리 붉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유진이 그토록 원했던 복수도, 노인이 설계했던 완벽한 진화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남은 것은 오직 살아남아 서로를 보듬는 인간들의 온기뿐이었다.
도준은 품속에서 낡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엄마가 보경당 지하실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마지막 편지였다. [도준아, 눈을 뜬다는 건 세상의 추함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아름다움까지 보게 된다는 뜻이란다. 네가 보는 세상이 부디 따뜻하기를 바란다.] 도준은 편지를 가슴에 묻으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맹목적으로 살아야 했던 바보의 시간도, 증오로 가득 찼던 괴물의 시간도 이제는 끝이 났다. 도준은 소년 '신'을 불러 마당 한편에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신아, 이 나무가 자라서 그늘을 만들 때쯤이면, 너도 누군가에게 커다란 쉼터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니까."
대단원: 맹목의 끝에서 마주한 찬란한 계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읍내 보경당을 태우던 무서운 불길 같은 비가 아니라, 메마른 땅을 적시고 생명을 싹틔우는 자비로운 봄비였다. 도준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다. 마음속에 새겨진 제문의 목소리, 소년의 숨결, 그리고 석구의 웃음소리가 지도가 되어 그를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문이 마루로 나와 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도준아, 비 오는데 국밥이나 한 그릇 말러 갈까? 읍내 주막 할매가 너 기다리시더라."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0화의 마지막, 세 남자는 빗속을 뚫고 오솔길을 내려갔다. 맹목의 덫은 사라졌고,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카메라가 서서히 멀어지며 약방 처마에 걸린 낡은 풍경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덫에 걸려 비명을 지르던 짐승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오직 서로를 의지하며 걷는 평범한 인간들의 뒷모습만이 남았다. 도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흑백의 해부도가 아니었다. 수만 가지 색채로 일렁이는, 살아있기에 찬란한 생명의 축제였다. 맹목의 덫, 그 기나긴 처방전의 마지막 장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살아라, 온 마음을 다해.'
[최종화] 맹목의 덫 완결 기념 총평 및 서사 분석
지난 40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맹목의 덫>이 도준의 인간성 회복과 평화로운 일상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본 연재물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을 위해 마지막 화의 핵심 의미를 정리해 드립니다.
- 진정한 구원의 의미: 주인공 도준이 원수를 모두 죽이는 파멸적 복수가 아닌, 자신을 닮은 소년을 살리고 의술로 회귀하는 결말은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는 진정한 승리를 상징합니다.
- 바보와 천재의 경계: 초반부 '바보'로 위장했던 도준이 후반부 '괴물' 같은 천재성을 보이다가, 결국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서사 구조는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반추하게 합니다.
- 세대 간의 계승: 도준이 소년 '신'에게 의서를 물려주는 장면은, 위원회가 심은 살인의 기술이 보경당의 치유 기술로 정화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짐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치입니다.
그동안 도준의 처절한 사투와 제문의 뜨거운 정의감을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블로그에서는 조만간 '맹목의 덫: 못다 한 이야기(외전)'와 '주요 인물 설정집'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작가님의 새로운 창작 활동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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