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30화 - 악의 성역, 안개 낀 요새의 혈투

바다는 거대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섬의 절벽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설계자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무법의 영토이자, 대한민국을 막후에서 조종해온 '위원회'의 심장부였다. 도준이 내딛는 섬의 흙은 소금기와 비릿한 혈향이 뒤섞인 기묘한 악취를 풍겼다. 수십 개의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해안가를 훑고 지나갔지만, 도준은 안개보다 더 소리 없이 경계망을 뚫고 요새의 외벽에 달라붙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감각으로 바위의 미세한 틈을 찾아내고 있었다. 가슴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도준은 은침을 가슴 정중앙 혈자리에 깊숙이 꽂아 고통을 강제로 차단했다. 이제 그의 몸은 오직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정교한 살인 기계와 같았다.

안개 속의 학살자, 보이지 않는 처방전

요새의 정문은 두꺼운 강철판으로 닫혀 있었으나, 도준은 정면 돌파 대신 폐시약이 흐르는 하수 배관을 선택했다. 그곳은 실험실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독성 물질이 부패하며 독한 가스를 내뿜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질식할 농도였으나, 평생을 보경당의 약초와 독에 노출되어 자란 도준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고향의 공기처럼 느껴졌다. 도준은 통로를 지키던 무장 가드들의 뒤편에서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서 뿜어진 은침은 가드들의 방탄복 사이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어 신경절을 끊어놓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 그들의 근육은 돌처럼 굳어버렸고, 도준은 그들의 총기 대신 자신이 직접 연마한 두 자루의 메스를 꺼내 들었다. "이곳은 진료실이 아니라 거대한 도축장이었네." 도준은 복도 가득 진열된 아이들의 뇌 스캔 기록들을 보며 은색 눈동자를 서늘하게 번뜩였다.

요새 내부로 진입할수록 경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삼엄해졌다. 하지만 도준은 그림자 속에 숨어 그들의 사각지대만을 공략했다. 그는 단순히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각 지점의 보안 요원들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통로를 봉쇄하고, 위원회의 수장들이 있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길을 전략적으로 확보해 나갔다. 그때, 복도 끝에서 중화기로 무장한 강화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안세훈의 요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농도 신경 강화제를 상시 복용하는 괴물들이었다. 도준은 벽을 차고 날아올라 그들의 헬멧 틈새로 독침을 꽂아 넣으며 공중에서 회전했다. 피가 튀는 현장에서 도준의 움직임은 마치 기괴한 해부학 강의처럼 보였다. 적의 힘이 강할수록 도준은 그 힘이 흐르는 길목을 정확히 끊어냈고, 요새의 복도는 점차 침묵의 공동묘지로 변해갔다.

요새 깊숙한 곳, 기괴한 의료 기구와 수많은 실험체의 기록이 가득한 위원회의 핵심 실험실


제문의 추격: 깨어진 침묵의 공조

한편, 도준이 남긴 좌표를 따라 거친 파도를 뚫고 섬에 상륙한 제문과 그의 팀원들은 참혹한 광경을 마주했다. 해안가부터 요새 내부까지, 뼈만 남은 채 마비된 가드들이 기괴한 자세로 조각상처럼 널려 있었다. "이건 싸움이 아니야. 이건 완벽한 해부다." 제문은 전율했다. 도준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으며 악의 뿌리를 도려내고 있었다. 제문은 요새의 중앙 관제실을 점령하기 위해 사격을 개시했다. 그는 도준이 위층에서 마음 놓고 사냥할 수 있도록 하부의 지원 병력을 필사적으로 차단해야 했다. 제문의 권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위원회의 보안 체계는 하나씩 무너져 내렸고, 그는 관제실 모니터를 통해 도준의 위치를 파악했다.

제문은 마이크를 통해 요새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소리쳤다. "도준아! 거기 함정이야! 더 이상 들어가면 안 돼! 모든 증거는 내가 확보했다!" 하지만 도준은 대답 대신 모니터를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준은 제문이 이곳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제문이 이 추악한 실험의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전 세계에 송출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이 거대한 악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결연함이 그의 은색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도준은 이제 자신을 제물로 바쳐 진실을 박제할 최후의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엔 위원회의 실권자인 '노인'이 수십 명의 의료진과 함께 도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의 광기와 마지막 발악

그때, 요새 지하 보일러실에서 거대한 진동과 함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유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폭탄 조끼를 두른 채 요새 전체를 통째로 무너뜨리려 달려들었다. 그녀의 복수는 안세훈이나 위원회의 파멸뿐만 아니라, 이 비극에 연루된 모든 인간—도준과 제문까지 포함한—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동반 자폭이었다. "모두 같이 타 죽자! 이 맹목적인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해! 우리는 모두 처음부터 죽어 있었어야 했다고!" 유진의 광기 어린 외침이 무너지는 복도 사이로 메아리쳤다. 폭발의 여파로 요새의 벽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천장에서 거대한 잔해들이 떨어져 내렸다. 도준은 폭발의 충격으로 바닥을 굴렀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30화의 끝, 연기와 먼지가 자욱한 최상층 집무실 안에서 도준은 휠체어에 앉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노인'과 마주했다. 노인은 읍내 보경당의 옛 주인이자 엄마의 스승이었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도준의 외할아버지와 묘하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나의 가장 위대하고 슬픈 피조물아." 노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도준의 머릿속에 억눌려 있던 어린 시절의 금기된 기억들이 둑이 터지듯 밀려왔다. 도준은 작두를 쥔 손을 심하게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40화 완결까지 단 10화, 모든 비극의 발원지였던 그 노인과 도준의 마지막 대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유진의 웃음소리와 폭발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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