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의 덫 제28화 - 유리 가면의 균열, 깨어난 짐승의 잠꼬대

병원 창밖으로 비치는 새벽빛은 차갑고 무심했다. 제문은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도준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벙커에서의 그 처참했던 현장 이후, 도준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하지만 의식을 되찾은 도준은 제문이 알던 '은색 눈의 포식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읍내 보경당 앞마당에서 흙장난을 치던, 모자라지만 순수했던 청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저씨, 여기는 어디예요?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온다고 기다리랬는데... 배고파요." 도준의 천진난만한 물음은 제문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 끝에 찾아온 구원일까, 아니면 추적을 피하기 위한 더 거대한 기만일까.

퇴행인가 연기인가, 의심의 늪에 빠진 형사

제문은 도준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광화문 유세장에서 번뜩이던 그 섬뜩한 은색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예전의 흐릿하고 초점 없는 검은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제문은 도준이 안세훈에게 내렸던 그 잔혹한 '처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각을 극한으로 증폭시켜 영원한 고통의 감옥에 가두는 기술은, 결코 읍내의 바보 도준이 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제문은 확인을 위해 도준의 발치에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를 슬쩍 떨어뜨려 보았다. 찰나의 순간, 도준의 발가락 근육이 공격을 방어하듯 미세하게 수축했으나, 그는 이내 해맑게 웃으며 메스를 집어 제문에게 건넸다. "아저씨, 이거 떨어졌어요. 조심해야 해요, 아야 하니까."

제문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연기라면, 도준은 이제 자신의 신체 반응까지 완벽하게 통제하는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 셈이었다. 한편, 병원 지하 비밀 병동에 격리된 안세훈은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도준의 침술로 인해 신체의 모든 근육은 돌처럼 굳었으나, 피부에 스치는 환자복의 감촉조차 수천 개의 불붙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통으로 변해 그의 뇌를 유린했다. 안세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성대마저 마비되어 오직 피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병실 문이 열리며 유진이 소리 없이 들어왔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안세훈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장관님, 아직 돌아가시면 안 돼요. 당신이 숨긴 '프로젝트 원본 데이터'가 어디 있는지 말해야죠. 당신의 고통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늘 아래의 움직임, 제3의 설계자들

유진은 안세훈의 눈꺼풀을 강제로 열고 특수한 신경 이완제를 주입했다. 도준이 걸어놓은 신경의 빗장을 일시적으로 풀어 정보를 캐내려는 수작이었다. 안세훈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며 무언가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유진의 작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원 보안팀으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세훈이 거느렸던 사설 요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무력과 세련된 장비로 유진을 압박했다. 유진은 연막탄을 터뜨리며 창밖으로 몸을 날려 도주했고, 사내들은 안세훈의 상태를 확인한 뒤 도준의 병실이 있는 윗층으로 향했다. 그들은 안세훈이나 국회의원보다 더 상위의 존재들, 이 모든 비극의 진정한 뿌리이자 설계자인 '위원회'의 청소부들이었다.

제문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낯설고 절제된 구두 소리에 본능적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도준아, 내 뒤로 숨어. 절대 소리 내지 마." 제문은 문 앞을 가로막고 사내들과 대치했다. 사내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제문을 향해 마취총을 겨누었고, 제문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최루가스가 병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제문이 기침하며 바닥으로 무너지는 순간, 사내들은 거침없이 도준의 침대로 돌진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선 사내들이 마주한 것은 이불 속에 웅크린 바보가 아니었다. 이불 속에는 베개와 베드 시트만이 교묘하게 뭉쳐져 있었고,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창문은 밤공기를 머금은 채 활짝 열려 있었다.

병원 복도 끝에서 도준의 병실을 지켜보며 누군가와 은밀히 통화하는 검은 양복의 사내


안개 속으로 사라진 괴물, 그리고 남겨진 증거

도준은 이미 병원 외벽의 배수관을 타고 내려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춘 뒤였다. 제문이 정신을 차리고 창가로 달려갔을 때, 바닥에는 도준이 남긴 작은 쪽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아저씨, 이제 나를 찾지 마세요. 나는 이제 아저씨의 법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만의 처방을 계속해야 해요.' 쪽지의 뒷면에는 읍내 보건소 시절부터 안세훈을 거쳐 '위원회'의 핵심 인물들로 이어지는 거대한 자금 흐름과 인명부 일람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바보 도준이 아닌, 세상의 모든 악을 해부하려는 냉혹한 설계자 도준이 남긴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제문은 그 종이를 움켜쥐며 도준이 향한 어두운 도시의 숲을 바라보았다.

28화의 끝, 도준은 도시의 가장 높은 빌딩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발밑의 네온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다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가슴의 총상은 스스로 놓은 은침과 옥상에서 구한 이름 모를 잡초의 즙으로 지혈된 상태였다. 그는 유진이 떨어뜨리고 간 안세훈의 비밀 칩을 입에 물고 씹어 삼켰다. "엄마, 이제 알 것 같아. 엄마가 왜 나를 바보로 만들려 했는지.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어.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보경당이니까, 내가 직접 고쳐야겠어." 도준은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 맹목의 덫은 도준을 억압하던 도구가 아니라, 그가 세상을 향해 놓은 거대한 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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